국립부경대학교 | 해양스포츠전공

바다이야기



바다 이야기


  • 역사 속의 바다 그리고 해양스포츠의 역할

  • 「포스트 자연」 이 말해지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짝지어질 수 있는 이 신조어(新造語)는 지금껏 지속된 인간과 자연의 모든 관계가 송두리째 해체되어야 함을 웅변해주고 있다.

    이제 생태중심주의가 논란될 수 있는 것도 포스트 자연과 무관할 수 없다. 이 생태중심주의에는 자연 생태조직의 통합성 보호를 내세우는 「생체윤리-Bioethics-」가 포함되어 있다는 면에도 주목하고 있다.

    인간은 순수 객체로서의 자연을 갖고 있지도 않고 그런 것을 누리지도 목하고 있다. 「인간 앞에 자연은 없다. 문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결코 편견도 과장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게자 로하임'은 트로브리언 제도(諸島) 원주민에 관한 정신분석학에서 산모(産母)가 애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규칙적으로 몸흔들림 하는 것이 파도의 출렁거림과 닮았다고 했다. 자연과 바다는 인간 행위, 사유(思惟)등 과 언제나 은유법적 유대를 나누어 가진 「씌어진 텍스트」로서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다도 자연도 모두 「글 없는 공-共-텍스트」다.

    하나의 문화는 하나의 바다를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다. 옛부터 해양문화가 생활의 일부로써 함께 하여 왔음 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허황후며 탈해, 그리고 신문왕 시대였던 가야 신라대가 끝나고 난 뒤, 바다는 온전한 텍스트가 못되었다. 바다에 물은 고여 있었지만 바다는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너비도 물마루도 그저 물리적인 것이었다. 한국인의 토플로지 속에서 바다는 부피를 박탈당했다.

    바다가 국토 바깥에 밀려나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다는 국토가 아니었다. 바닷가만이 언저리가 아니라 바다가 숫제 통으로 변두리이었다. 변방이었다.

    크게 보아서 중세이후 「바다론」 이라고 할 만 한 글은 없다. 회화예술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한국인의 담론 체계에서도 바다는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국토에서 바다를 젖혀놓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 목을 스스로 죄고 드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과도 같은 잘못이 거기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고대를 반추해 보면 적잖이 위안이 된다. 정신적 전진을 위한 무한대의 바다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야신화에서 바다는 어머니의 공간이다. 탈해 신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신라 30대 문무왕은 삼국통일 이후 반도(半島)에서 바다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인류사에 가장 먼저 바다중심의 정치논리를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은 바다를 외면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를 모신 맏아들 신문왕이 바다를 좌절할 수 없는 인간의지 최후의 둥지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들을 통털을 때, 바다는 수평의 건너편에서 수직의 건너편인 하늘과 대칭을 이룬다. 물론 이런 바다의 이미지는 고려왕조의 창건신화에도 이어진다.

    이를 조금 더 소급시켜 철기시대와 청동기 후기쯤으로 평가되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이르면, 한국인의 바다는 삶에 활기가 출렁이게 된다. 거기에는 한바다를 가르는 카누형의 선단(船團)이 발견되고 있다. 바다 없이 삶을 논하지 못할 당대인들은 다름 아닌 부산 연안의 해역에서 살던 주민들이다. 특히 우주구성론(Cosmologe)에 바다를 개재시킨 한국해양문화의 기념비로서 ★반구대 암각화는 당당하고도 남는다.

    결국 암각화의 바다와 상고대(上古代)신화의 바다, 여기에다 신라 문무왕(661-681), 신문왕(681-692)그리고 장보고(?-846)의 바다가 있었다고 말 할 수는 있다. 그중 장보고는 9세기 한-중간에 해상지역을 완전히 세력권에 넣고, 이어서 일본과 동남아에 이르는 동아시아(태평양 서부지역)를 제패하여 지난날 백제가 바다를 제패하여 산동-절강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비롯하여 일본 오끼나와에 걸쳐 건설했던 해양제국을 명실공히 다시금 구현하여 해양대국 신라의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사정이 딴판이다. 중세기까지 간신히 홍길동전에 자국을 희미하게 남기게 될 뿐이다. 예컨대 가사문학에서 박인로의 선상탄(船上嘆)을 꼽고,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친다고 해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다의 퇴락이 시작된다.

    중세기 내내 한국인의 바다는 변경이요, 변방이었다. 유배지이었고, 사람이 살만한 곳도 아니었다. 더욱이 남해는 한층 더 흉한 사태를 겪어야 했다.

    위/아래, 안/바깥 등의 두얼리즘은 서울과 지방의 대칭 관계에 에누리 없이 적용된다. 남해에는 땅끝(土未)이라는 지명이 있듯이, 아래의 아래고, 바깥의 바깥으로 천대받아 왔다.

    바닷가 사람에게는 「갯놈」, 「뱃놈」 이라는 비칭이 따라붙었고, 그들은 또 「생선 뱃대지 따먹는 놈」이라고 폄아 당하기가 일쑤였다. 산/바다, 물/바다의 양분적 대립에서도 바다는 늘 불리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이단시 되어오기도 했다. 그게 아래의 아래고 바깥의 또 바깥인 남해에서는 더한층 격심했다.

    북/남의 전 국토 적인 양분론에서, 같은 영남에서도 심지어 지역을 경남 안으로 좁혀보아도 별로 사정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뜻으로 경남과 부산일대의 바다는 다시 한 번 더 아래의 아래다.

    지리산-덕유산-가야산 그리고 천황산을 잇는 태산준령의 맥을 그 아래서 경상우도 유학의 학통이 태어나서 자라나게 한 거대한 문화의 품이다. 남명 조식의 "산천재"가 웅변하듯이 어진 선비의 터전이었다. 여기에다 유농(濡農)일체가 실천되는 곳이기도 했다. 선비가 학문을 숭상하면서 대물림하며 살아가는 고장이 바로 그곳이다. 명찰이며 거찰 또한 거기 즐비했었다.

    경남 지역 안에서도 북상남하(北上南下), 북귀남천(北貴南賤)의 사시(斜視)로 남해를 바라보던 그 시각이 20세기 중반을 넘으면서 지역 내에 엄청난 세력이동이 경제, 문화양면에 걸쳐서 있으리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울산-부산-창원-마산-사천을 잇는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는 국가경제, 문화적 비중을 그런 사시적 눈(目)으로는 도저히 넘겨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점은 남해의 민속지(民俗誌)를 대하면 한층 분명해 진다. 이를테면 바다가 입은 상처가 해일처럼 갑자기 거칠어지는 것이다.

    통영, 고성, 삼천포를 잇는 남해의 해역에는 반영웅(Anti Hero)이야기, 근친간 이야기, 비운의 영웅 등이 분포되어 있다. 또 그것들은 물/바다의 이분법에 가담하고 있다. 남해별신굿, 배서낭 신앙, 그리고 동해의 별신굿은 육지의 각종 별신굿이며 서낭신앙을 압도한다. 남해안 민속신앙이야말로 기독교의 전파를 상대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반영웅은 바다살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구세(救世)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난신 짓을 하고 마침내 역신으로 몰려서 횡사한다. 그가 납치한 관원의 아내에게 배반당했기 때문이다.

    반영웅이 국가라는 권력사회의 역(逆)이었듯이, 근친간은 인간 윤리의 모반일 수밖에 없다. 극도로 기피된 반륜(反倫)의 더러움이 별로 넓지도 못한 해역안에 그것도 지척간의 두 섬, 사량섬과 매몰섬에 처박혀진 것이다. 결국 검푸른 몸살로 에워싸인 섬에다 처박음으로서 일종의 모순어법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 된다. 가령 제주민속에서 먼 바다란 인간재앙을 대신 도맡은 희생양인 도깨비를 축출하는 이승 밖의 저승이었음을 생각하게 되면 한국인에게 바다는 슬프고 비통한 무슨 원죄(原罪)의 공간으로 부각되게 된다.

    여기에다 남해는 또 다른 부(負)의 기호가 매겨져 있다.

    남해는 지키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바다의 변방의식과 겹쳐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남해는 진출과 개척의 공간, 신세계일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흔히 일의대수(一依帶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띠와 같은 좁다란 바다가 현해탄이라 불려질 때와 남해라고 불려질 때와는 대조적으로 차별화된다. 현해탄과 남해는 결코 같은 문화적 토플로지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진출이 가능하고 새로운 세계가 약속되는 바다는 대양이고, 해양이다, 그것은 항로, 항해, 개척, 모험 등이 실천될 일본 몫의 남해였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침범 당할까 두려운 그저「개」 요 「갯가」에 불과했다. 일인들은 해양인데도 저들 안방 누비듯 해 왔다. 물이 들면 통발로 고기마리나 잡고, 물이나면 해초나 캐고 꼬막 등을 개발이나 하며 자족하는게 고작인 그런 갯벌이었다.

    그렇지만 근자에 들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불모의 바다가 바다목장 바다농장으로 변했다. 여기에다 남북의 부가가치도 달라졌다. 이제 남해는 세계화의 전진기지다. 태평양시대 한반도가 차지할 우위적 위치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고, 그 핵심에 부산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 주변의 해안 지대가 시베리아에 이어질 동북아시아 문화의 최종적 멜팅 폿이었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울주 암벽화가 그렇고, 신라와 가야의 신화가 그렇다. 상고대는 불교, 중근세는 유교가 각각 녹아들면서 그 멜팅 폿은 전통성을 살려 왔다.

    멜팅 폿은 이미 있는 것을 받아들여서 총괄하는 성격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총괄성을 바탕에 깐 다양한 복합적인 문화를 보편성 강한 문화로 새로이 창출할 터전이 된다. 그 중심지가 부산이다. 그러나 부산은 회고하는 눈길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지정학적 위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상고대 교역지였던 동남아에서 시작하여, 중국과 극동러시아를 거쳐 일본을 잇는 거대한 나선형의 호선(弧線)속에서 부산은 알의 씨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부산의 경제 문화적 「에코센츄리즘」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천착할 수 있어야 한다. 제로기호로 방기(傍棄)시켜 온 남해를 극대의 기호로 치환시키되, 환경 친화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부(負)와 역(逆), 그리고 변방의 그림자를 에코센츄리시즘의 카테고리 안에서 떨어내면서 비약에 비약을 약속해야 한다.

    개방과 발전, 전진과 개척, 그리고 자연과 환경이 재생하고 소생할 바다는 부산의 지역 스포츠인 해양스포츠 활성화가 한 몫을 당당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환경 친화적인 해양스포츠는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생체윤리의 기호가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해양체험의 질적 가치를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일과 의식의 일체성 확립에 매개체(媒介體)로서 작용하여 역사의 바다에 드리워진 부(負)와 역(逆), 그리고 변방의 그림자를 말끔히 씻어 낼 모험과 개척의 정신을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그 전진기지는 부산이어야 한다.